지문(指紋)의 확장, 시간 순연의 확장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는 사진을 통해 기억을 귀정(歸程)의 일부분으로 끄집어내어 화면에 옮긴다. 그곳엔 특정한 추억을 공유했던 지인들이 등장하고 발자취를 남겼던 어떤 풍경이 수놓아지며, 도시와 일상이 들어선다. 간혹 모호한 형상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재현성을 띠기에 인식 가능한 범주에 놓인다. 저건 무엇이고, 이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용은 언제나 난해하지 않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의 사진이, 혹은 그것을 통한 찰나가 단순한 기록의 연장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때, 또한 그것이 재구성되는 재현의 베이스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작업엔 그 이상의 것이 투영되어 있음을 읽게 된다. 그건 바로 선택을 통한 기억의 지문(指紋)이요, 그가 선택한 사진은 그 기억의 지문을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엿보게 하는 질료(matter)가 된다는 사실이다.” 

위 기술한 문장은 지난 2011년 열린 개인전 당시 민준기의 작업에 대한 가치구분을 담은 비평의 일부이다. 당시 필자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특징과 내용적인 부분에서의 내외적 연계성을 언급하며, 재현으로써의 사진이 어떻게 실험적으로 변주되는지, 작가 개인의 파편화 된 기억들이 어떻게 공명을 유도하고 있는지 적시한바 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민준기의 사진 작업은 기억을 영원함 속에 포박함으로서 변하지 않는 카테고리를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목록은 일개의 형식에서 벗어난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가변적 조합으로 재생산 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장르 간 경계가 사라진 작금 그의 사진은 어떤 표현을 위한 적절한 장치이거나 작업의 주제를 더욱 주제답게 이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의 작업이 2014년 들어 장르의 경계 넘기를 통해 또 한 번 새롭게 확장 및 전개되고 있다. 우선 기억을 쌓고 거두는 기존 행위를 확대한 작업으로 형식의 확산을 꾀하고 있는데, 지난 2011년 전시에서 보여준 낱장의 사진작업은 층을 이루고, 층을 형성한 사진들을 거푸집 내에 존재시킴으로써 보다 집약되는 결과를 내보이고 있다. 나아가 그 집약은 기억의 축적으로, 갇힐 수 없는 것들 혹은 갇히지 않을 것들, 갇혀야 할 것들을 편집, 누적시키고 포개놓는 방식 아래 이전 대비 훨씬 견고하게 옮겨 놓고 있다. 
이때 겹겹이 쌓인 이미지들은 2차원적인 평면에서 이탈해 실제에 대한 가상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 한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 드리워진 간극의 매개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피사체나 공간의 재구현이 아니라, 기억 속 잠재태에 머물던 편린들이 이전과 또 다른 현실태로 견고히 고착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때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앞면이 개방된 직사각형 나무프레임이다. 이 프레임은 과거의 그의 작업들이 그러했듯, 현실과 조우하는 통로이면서 현실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증명하는 장치이지만, 그 장치가 시각적, 물리적으로 견고해졌다는 측면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과거 작업과의 차이를 유도한다.
그가 새롭게 선보이는 영상작업은 이전 작업에서도 그러했듯 ‘시간의 순연’을 재구성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접근법을 달리하고 있다. 일례로 2014년 전만 해도 작가는 일종의 비물리적 연속성을 따르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분절(分節)시키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캔버스에 덧입혀진 조각난 한지를 통해 드러내 왔다. 한지를 잘라 캔버스에 조각조각 덧입히는 과정은 그것자체로 기억의 찰나를 기록하는 행위라 해도 그르지 않았으며, 인간의 정신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단상들을 일일이 채록하여 안착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었다. 
또한 조각난 한지는 작가의 주관적인 시도 아래 기억이라는 시간의 순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편이자 이탈을 증좌 한다. 하지만 최근 선보인 영상작업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그의 한지작업들과는 별도로 일종의 시각적 규정에 함몰된 편린을 증폭시키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면서 시각과 기억, 시간과 공간이라는 다층적 교차, 관계를 맺은 채 서로 다른 개폐 구조 체계를 완성하는 수순을 내보인다.
따라서 한지에 투영되고 그려진 2011년 전시에서 선보인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의 순연에서 탈선해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를 규정했다면, 지금의 작업들은 탈구축이라는 방향선회를 통해 열린 체계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해도 그르지 않다. 단일 형식으로 재현되었던 기억의 집약체계를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최근 작업의 경우 공간까지 아우른다는 점이다. 추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정지된 것이 아닌 시간의 연속성을 가시적으로 증명하고 있으며, 이전 사진콜라주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을 잡아들이려 했다면 이젠 하나의 영화 같은 흐름으로, 일상의 상징언어로 근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일부 작품에서 엿보이는 추상성으로 해석의 풍부함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기억과 연계된 다양한 감성적으로 풀어내려 함을 인지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기의 작업은 하나의 일정한 맥락이 읽힌다.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존재 형식이 시간이고 사진 속의 시간은 정지해 있으나 사진 밖의 시간도 동시에 유동한다. 특히 사진 속 형상은 유구한 고착성을 띠지만 설치, 영상 속 이미지들은 기억에서 이탈해 다면화 되고 공유된다. 그리고 현재의 이와 같은 기억과 시간, 공간과의 감응은 끝없이 병립된 채 관객들을 맞는다. 
오늘날 작가는 기록의 나열이 아닌, 기억의 재생을 관통하는 새로운 창의적 시도를 지향하고 있다. 옛 비평을 다시 환기할 때 “비시와 같은 시간에 비례하여 흩뿌려진 기억들을 주관적 선택 하에 이입하여 타자로 하여금 간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느낌과 감정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에 주된 지향성이 있다.” 중요한 건 작가의 경우 진지한 고민과 실험적인 자세로 다양한 조형언어들을 개발해내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스트모던 미학의 시대, 그 한복판에 영상이 있음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유의미하다. 근대사회가 이성을 앞세운 과학의 시대였다면 포스트모던 사회는 감성을 중시하는 미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물론 이번 개인전에 선보이는 몇몇의 작품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준기가 시연하고 있는 사진적 영상의 지표적 특징들에서 말이다.■







-작가 민준기 작품에 대한 소론

홍경한(미술평론가)

1. 고요하다. 아니, 조용함과 잠잠함을 넘어 때론 적막마저 느껴진다. 작가도 그렇고 사진 작품도 그렇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이 매력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언행이 번잡스럽지 않다는 것은 대개 그만큼 내적인 면에 비중이 있음을 지정하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평온한 작품 속 이면엔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억의 회로가 침잠되어 있다. 그건 마치 쉼 없이 터지는 발광체처럼 분열과 자가 복제를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감정이 얹힌 환기의 산물로 수없이 잉태되곤 한다.
작가 민준기는 사진을 통해 기억을 귀정(歸程)의 일부분으로 끄집어내어 화면에 옮긴다. 그곳엔 특정한 추억을 공유했던 지인들이 등장하고 발자취를 남겼던 어떤 풍경이 수놓아지며, 도시와 일상이 들어선다. 간혹 추상성이 강하면서도 모호한 형상자체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재현성을 띠기에 인식 가능한 범주에 놓인다. 저건 무엇이고, 이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용은 언제나 난해하지 않다.
그러나 현대예술에서의 사진이, 혹은 그것을 통한 찰나가 단순한 기록의 연장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제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때, 또한 그것이 재구성되는 재현의 베이스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작업엔 그 이상의 개념이 투영되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건 바로 선택을 통한 기억의 지문(指紋)이요, 그가 선택한 사진은 그 기억의 지문을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엿보게 하는 질료(matter)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어 다른 관점에서 민준기의 작품은, 현재와 과거 사이에 드리워진 간극의 매개로 위치한다. 공간적이며 영토적인 외재형식, 보이는 인식자체와는 다른 이것은 특정한 피사체나 공간의 재구현이 아니라, 기억 속 잠재태(潛在態)에 머물던 편린들이 현실태(現實態)로 전이되어 자신만의 언어로 담보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작가는 “나의 작업은 지나간 것들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 의해 여과되고 선택되어진 기억들을 찾는 것이다. 사진을 촬영했을 당시와는 다른, 현재의 기억 속에 담겨 있는 것들, 다시 돌아가고 싶거나 보고 싶은 사람들의 사진 속 모습을 현재의 내가 기억하고 추억하고자 하는 것의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의 발언에 의한다면 민준기의 사진 작품은 기억의 미메시스(mimesis)이다.
주지하다시피 미메시스는 실제에 대한 가상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인다. 또한 미메시스는 직접 인지되어 사물의 본질이 나타나는 방식의 하나인 가상을 통한 현실과 조우하는 통로이며, 현실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증명하고 그 현실내용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적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민준기에게 있어 사진이라는 매체는 꼭 알맞은 표현 도구임에 틀림없다. 시공을 달리하는 와중에도 교류를 생산할 수 있는 매체이자, 사진이란 재생을 뒷받침하는 단초로서 그 어떤 것보다 안정적인 탓이다.
2.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존재 형식이 시간(時間)이고 사진 속의 시간은 정지해 있으나 사진 밖의 시간은 흐른다. 사진 속 형상은 유구한 고착성을 띠지만 사진 밖의 ‘나’라는 존재는 그 당시의 기억 속에도, 그리고 현재의 시간에도 양립한다. 따라서 그 자체는 디제시스(diegesis)가 아니다. 다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나 분명히 실존했던 인상이나 경험 등이 의식 속에 간직된 채 도로 표피화 될 따름이며 사진은 나라는 실체를 기준으로 그 극공(隙孔)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가 사진을 접할 땐 드러난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간과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엔 초점을 두지 않는 것이기 일쑤다. 사진 내부의 형상을 좆고 직조하려할 뿐, 내부에 흐르는 유속 강한 환류와 그것을 받쳐주던 외연적 요소인 환경, 분위기는 물론 소소한 사물까지 분리되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작가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또한 관련된 다양한 것들) 교류할 수 있는 지점이 그 장소에 놓여 있음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확인해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단순한 시각에 의존한 잔상의 연장이 아니라 ‘시간의 순연’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간은 다층적인 접근을 허용한다. 이것은 일종의 비물리적 연속성을 따르지만 작가는 이를 인위적으로 분절(分節)시키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캔버스에 덧입혀진 조각난 한지를 통해 드러낸다. 일단 작가가 한지를 잘라 캔버스에 조각조각 덧입히는 과정은 그것자체로 기억의 찰나를 기록하는 행위라 해도 그르지 않다. 인간의 정신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단상들을 일일이 채록하여 고착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조각난 한지는 작가의 주관적인 시도 아래 기억이라는 시간의 순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편이자 이탈을 증좌 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에게 시간은 파피에콜레 형식(한지 콜라주)으로 부분화되고 분리된다. 사진의 복제성을 넘어 유일한 원본성을 대리하고 회상의 파편을 상징하기도 하는 이 한지 콜라주는 채색효과나 구체감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크지만 실상은 조금 더 미묘하고 복잡한 구성을 따른다. 그것을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의 이론을 빌려 말하자면 처음엔 하나의 나무형으로 시작되었다가 다시 리좀(rhizome)형식으로 환원되고, 재차 수목형 체계로 마무리되는 구조와 유사성을 지닌다. 즉 일종의 규정에 해당하는 편린들이 증감(增減)하면서 잠재성의 방향과 현실성의 방향이 양자 간 교차, 왕래, 관계를 맺고 캔버스 위에서 서로 다른 개폐 구조 체계를 완성하는 수순을 밟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붓 대신 민준기의 손에 의해 한지에 투영되고 그려진 각각의 파편들은 시간의 순연에서 탈선해 그 자체로 유의미한 다양한 집결지를 가질 수 있는 체계를 규정하며, 그런 만큼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를 지니다가 전체나 단일 형식으로 재현되는 체계를 집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작가는 콜라주를 통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을 수채화와 같은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처리하거나 바니시를 바르는 등의 방식으로 회화의 영역에 다가서는 의도를 내보인다. 특히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에 대해 직접적이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빛, 색, 형태, 양감의 호흡, 은은한 컬러와 안개가 낀 듯한 여감은 사진이 지닌 원색의 생생함이 기억의 되돌아 흐름을 다루기엔 부담스러운 것이었을 수도 있으나 복잡한 미학적 수사를 대신할 만큼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원인이 된다. 작가는 이를 “지나가버린 희미한 잔상과 기억들의 편린을 재생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고 말한다.
3. 사진은 구성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기록할 때 비로소 구성적 힘을 지닌다. 사진기를 통해 들여다 본 세상은 단추를 누르는 순간 일시 저장되나 본질적으론 기억으로 멀어지게 된다. 작가 민준기는 이를 영원함 속에 포박함으로서 변하지 않는 기억의 카테고리를 생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작품으로 생성된 목록은 일개의 형식에서 벗어난 가시적인 것과 언표 가능한 것의 가변적 조합으로 재생산 된다. 하지만 그에게 사진이 우선은 아니다. 장르 간 경계가 사라진 작금이 그러하듯 사진은 표현의 하위 개념이고, 그 표현을 위한 적절한 장치이거나 작업의 주제를 더욱 주제답게 이끌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민준기의 작업을 ‘사진’의 영역에서만 해석함은 절반의 독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작업의 거푸집은 기록의 나열이 아닌, 기억의 재생을 통한 새로운 창의적 시도이다. 비시와 같은 시간에 비례하여 흩뿌려진 기억들을 주관적 선택 하에 이입하여 타자로 하여금 간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느낌과 감정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에 주된 지향성이 있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그 공유의 틈새로 들어설 수 있는 통도(通道)로서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여백에서 묻어나는 사색의 기운, 아련한 듯 몽환적인 감성의 전이는 별다른 수식어가 없이도 충분히 인상적인 여운을 환기시키지만 문득문득 순간의 지연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부정하긴 힘들다. 그럼에도 그는 늘 진지한 고민과 실험적인 자세로 다양한 조형언어들을 개발해 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민준기 작업의 근본적 장점인지도 모르며 젊은 작가에게 주어질 가능성인지도 모른다.■